히젠도라는 칼의 이야기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한 신사에는 히젠도라는 칼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칼의 칼집에는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칼의 주인 도 가츠아키는 조선의 명성황후를 이 칼로 벨 때 그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고백하며, 1908년 양심의 가책으로 인해 이 칼을 신사에 맡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을미사변에 참여한 낭인들은 도 외에도 서로 명성황후를 죽였다고 주장해서 도의 말이 사실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또한, 진범은 이 낭인들이 아니라 일본 순경이나 군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까지 있는 실정입니다.
을미사변의 배경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난 날, 새벽 총소리를 듣고 경복궁의 이변을 감지한 미국 공사관 서기 알렌과 고종의 화급한 전갈을 받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그날 오전 일곱 시쯤에 입궐했습니다. 그들은 1시간 반가량을 기다려 고종을 알현하러 갔는데, 거기에는 고종과 일본 공사관의 미우라 공사가 함께 있었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훈련대와 순검의 충돌을 막아달라는 고종의 요청으로 일본군을 보내 현장에 도착해 보니 사태는 일단락된 뒤였다고 말했습니다.
새벽에 총소리를 듣고 잠을 깼던 또 한 명, 우치다 영사는 경복궁에서 막 돌아온 낭인으로부터 사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우치다는 정오가 지나 일본 공사관으로 찾아가 고종과의 알현을 끝내고 돌아온 미우라 공사를 만났습니다. 미우라는 큰일이라는 우치다에게 “아니, 이로써 조선도 드디어 일본 것이 되었다. 이제 안심해도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치다는 명성황후 살해에 각하를 비롯해 공사관원, 영사관원, 일본군이 관여한 사실이 외국인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라고 어쩔 작정이냐고 물었습니다. 미우라는 이 사건을 대원군파와 민미파의 싸움으로 꾸미고 일본군 수비대는 이 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궐에 들어갔다고 변명하며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입단속을 잘 시키면 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치다는 일단 사건을 은폐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의 은폐 시도
을미사변 이후 한성신보의 보도에 의해 을미사변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로부터 권력을 빼앗기 위해 벌인 일로 둔갑해버립니다. 한성신보는 비록 조선에서 발간되고 있었지만 일본 공사관에 의해 창간되었고 공사관으로부터 모든 돈을 지급받고 운영되는 기관이었습니다. 일본의 주요 신문들은 이 한성신보 기사를 인용해서 대원군과 조선인들이 한성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보도해 국제여론을 이끌었습니다.
일본은 정부 규모의 매수 공작을 해서 사건을 호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도쿄 니치니치 신문사 사장은 수상 이토 히로부미의 허락을 얻어 6,000엔을 정부로부터 받아 뉴욕헤럴드 특파원을 매수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증언을 토대로 외교관들이 여러 보고들을 작성했고, 점차 진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실의 발견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여러 증언과 보고서들에 의해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치다 영사는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정보를 외무차관 하라 다가시에게 비밀리에 보고했으며, 그 보고서에는 일본군과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구체적인 과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본 수비대의 미야모토 소위가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 있었고, 이는 일본 군 수뇌부 전체가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데라자키 다이키치는 자신의 회고담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한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며 자신이 그녀를 한 칼에 내리쳤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진범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일본 군부와 낭인들이 을미사변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을미사변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일본의 은폐 시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증언과 보고서들에 의해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사건들은 철저한 조사와 검증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는 데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